2018 <경계의 모양-집합 A·B>에 붙여 이현인
박두리 개인전 <경계의 모양-집합 A·B>에 붙여
이현인(독립큐레이터)
200km의 간격을 두고 열린 한 작가의 두 개의 전시가 있다.
<경계의 모양-집합 A>와 <경계의 모양-집합 B>. 박두리는 두 전시를 통해 전주와 서울이라는 두 장소의 상황과 조건이 빚어낸 심리적 풍경을 꺼내 놓는다.
<집합 A>의 풍경. 수풀 속 둥근 무지개, 마른 짚더미에 앉은 작은 동물, 풀무더기를 잔뜩 뒤 집어쓴 표정 없는 사람, 물웅덩이에 몸이 반쯤 가라앉은 채 바위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사 람, 다소 추상적으로 변형된 아버지의 새 조각, 그리고 소소하지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한 일련의 드로잉들.
<집합 B>의 풍경. 신비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나무를 둘러선 사람들, 어둠 속 나뭇가지에서 몸 을 드러낸 사람, 불타는 나뭇가지와 작은 동물의 뼈가 놓인 파란 테이블 주변에 핀 마르고 연 약한 식물들, 작은 습작들, 무지개를 가지고 노는 손과 식탁에 둘러앉은 얼굴 없는 사람들과 지워진 풍경들.
“최근 진행하는 작업은 대상과 마주쳤을 때 ‘소외된 감정’과 동반하여 떠오르는 이야기, 몽상 을 결합한 작업을 하고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하는 백일몽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소외된 감정 이 튀어 오르는 순간 그 대상과 감정이 결합된 이야기를 가지고 백일몽을 꾸게 된다.”
박두리가 꺼내 놓는 다양한 심리적 풍경이 백일몽이라는 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러한 전환은 박두리의 미학적 실천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사전적으로 백일몽은 자신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 직·간접적으로 충족되는 비현실적인 세 계를 생각하거나 상상하는 과정 또는 그러한 꿈을 의미한다.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의 과 도한 욕망을 저지하려고 행동하기 마련인데, 백일몽은 그 저지 상황을 해결하는 일종의 도피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백일몽에 빠져드는 것은 인지 실패 혹은 인지 피로의 신호, 상황의 통제 못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박두리가 이미 밝히고 있듯, 작가에게 백일몽은 소외 된 감정에서 시작된다. 외부 세계와 접속되었을 때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감정의 숨김은, 작가 의 내부 세계 안에서 소화되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축적되며 갈등을 만들어 낸다.
박두리에게 있어 숨겨진 감정이 만들어 낸 백일몽을 꺼내 놓는 것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마주 하는 순간이 된다. 분명하지 않은 언어로 뭉툭하게 존재하는 무수한 감정들을 특정한 형태를 가진 그림을 통해 외부 세계에 꺼내 놓는 순간, 작가 역시 전환의 순간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왜 풍경일까? 표현적으로 볼 때, 박두리의 그림은 사뭇 빠른 붓놀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물들은 얼굴이 지워져 있거나 표정이 지워져 있다. 풀무더기와 수풀은 식물 특유의 생동함보다는 연약함을 드러내는 요소로 존재하는 듯 보이며, 엄폐의 장소처럼 보인다. 빠른 붓놀림이 만든 거친 형태는, 비록 바깥으로 꺼내지긴 했으나 여전히 불안하고 정의되지 못한 감정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풍경은 숨을 수 있으면서도, 빠져나오고 싶은 이중적인 장소 가 된다.
“이러한 작업은 나의 감정과 대상이 무의식 속에서 융화되고 그것이 다시 의식화되더라도 지 속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그려지는 풍경은 고립되어있던 감정이 외부와 만나게 해 주
는 매개체적 역할을 해 주고 미묘한 내면의 감정을 투사한 풍경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다시 전시 제목으로 돌아가 보자. <경계의 모양-집합 A> 그리고 <경계의 모양-집합 B>. 아마도 박두리가 말하는 경계는 고립된 내면의 감정이 외부와 접촉하는 순간 혹은 표면을 이 야기하는 것 같다. 작가는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지 못한다. 사실 작가뿐 아 니라 누구도 경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계의 모양은 때론 매끈하기도 거칠기도 하고, 때 론 느슨하기도 긴장되어 있기도 하다. 경계의 모양은 늘 변화무쌍하고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 로 무언가는 남겨 둔 채 혹은 감춘 채 타인과 접촉하여 집합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우리는 늘 교집합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박두리의 캔버스에서 이야기는 여전히 비밀스럽게 남겨져 있다. 간혹 작가는 그림과 함께 텍 스트를 병치하는 방식을 실험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떠올랐다 가라앉은 감정들을 마치 수수께 끼처럼 은유하여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이유는 없다. 때로는 밝히지 않음으로써 선명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