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그리기의 혼잣말 혹은 몽상(夢想)> 백기영

리기의 혼잣말 혹은 몽상(夢想)

백기영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





초록빛이 감도는 저채도의 두 화폭에는 땅 속에 무언가를 묻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그려져 있 다. 위쪽 직사각형에 가까운 그림이 아래 정방형 그림의 부분이거나 두 그림이 순차적으로 연 결되는 두 칸짜리 만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2016년에 박두리가 그린 <녹는 것을 숨기기>라는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위쪽 화면에 등장하는 ‘하얀 돌’, ‘넓적한 물건’, ‘밀가루 반죽 같은 덩 어리’, 혹은 그가 ‘녹는 것’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아래 그림의 소년은 이것을 땅에 파묻고 있다. 이 그림은 미처 그려지지 않은 다음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가 말한 대로 이 하얀 덩어리는 땅에 녹아서 흡수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녹아 없어질 것 이라면, 굳이 땅에 수고스럽게 묻어야 했을까? 위쪽 화면, 소년의 두 손에 비밀스럽게 땅 속 에 자리 잡은 이 ‘녹는 것’은 매우 안정적으로 화폭을 푹신하게 누르고 있다. 두 장면은 암매 장을 감행하고 있는 범죄현장의 것처럼, 은밀하다. 여기에 숨겨진 ‘녹는 것’은 숨기는 순간 사 라지는 것이다. 아니면 작가의 표현대로 녹아 없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행 위를 마치 한 밤중의 몽유병 환자가 꿈 인지 생신지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지른 일처럼 기 억의 저편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그림의 연속으로 읽어야 할까? 전혀 무관한 다른 이야기라 해야 할까? 2017년 작가는 <녹 는 것이 묻힌 곳> 이라는 세 개의 캔버스가 연결된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산기슭을 그린다. 진 입금지 표지판이 세워진 돌무덤이 그려진 캔버스를 중심으로 좌우에 풍경이 시야를 확장하고 있다. 소년이 땅에 묻고 있었던 ‘녹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형질이 변화하거나 상태가 달라 져 은폐의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부드러운 흙을 파헤치고 숨겨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것은 땅 그 자체가 되어 버리거나 소년의 행위조차 산화시킬 수 있는 연금술의 장소여야 한 다. 완전 범죄를 위한 암매장은 범죄자 스스로에게 조차 잊혀 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녹는 것이 묻힌 곳>은 그저 평범한 땅의 그림이 아니라 자기만의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돌탑을 쌓 아 올리는 사람들의 흔적을 드러낸다. 게다가 진입금지 표시판이라니?

같은 해 박두리의 또 다른 입체 작업 <경계의 모양>은 위의 세 폭 풍경화에 등장하는 것 같 은 돌덩어리, 나뭇가지 등을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해서 흰 색 돌무덤을 쌓아올렸다. 작품 진 열대 위에 올려 있기 때문에 이것은 조각이나 설치작품으로 앞의 그림들의 연속관계에서 튀어 나온 상징물처럼 보인다. 무엇의 경계일까? 앞의 그림에서 작가가 녹는 것들을 땅에 묻기 위 해 빚어낸 형상, 그리고 그것이 묻혀 있었던 곳의 상징적 모뉴멘트로서의 돌무덤, 사라지기를 희망하고 땅에 묻었던 비밀스러운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명료하게 자기 모습을 드러낸 다. 그리고 이 작업을 지나면서 <녹는 것을 숨기기> 시리즈는 <무지개 연구소> 시리즈로 방 향을 전환한다.

<무지개 연구소#1-4>는 모두 네 개의 화면으로 이루어진 한 작품이다. 이 그림도 네 칸짜리

 

만화의 장면들처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왼쪽 위편에 자리하고 있는 그림에는 예의 소년의 손처럼 보이는 인물이 무지갯빛 띠 물질을 주물러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 <녹는 것을 숨기기>에 등장하는 소년은 하얀 반죽 덩어리 같은 것은 땅에 숨기고 있었다면 이 그림에서 그는 무지개띠 반죽을 만들고 있다. 녹는 것의 실체가 돌덩어리 같은 고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라면 눈부시게 빛나는 무지개는 주물러 반죽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무지개들은 발 광하는 빛에 노출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방사능과 같은 강렬하고 무서운 빛이다.

오른쪽 위 화면에는 이 무지갯빛이 소용돌이치면서 바닥으로 빠져드는 구멍이 그려져 있다. 무지개가 발광하는 용광로의 구멍처럼 이 구멍에서는 무지개 형광물질이 맴돌고 있다. 무지개 띠무늬는 책상 위에 줄지어 붙어 있거나 책상표면에 들러붙은 밀가루 반죽 같은 물질로 드러 난다. ‘녹는 것’을 주물러 돌을 빚거나 광학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무지개를 빚어서 조형작업 으로 삼는 행위는 매체와 감각에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행위는 매우 몽환적이고 편집증(偏執症, paranoia)적 이다. 작가는 중얼거린다.

“무지개는 손으로 쥘 수도 발밑에 밟을 수도 없다. 무지개를 가지려 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연구소에 온 계기는 다양하다. 전 1차 무지개를 만들 겠어요. 전 2차 무지개를 만들겠어요... 전 수평 무지개를 만들겠어요. 전 안개 무지개를 만들 겠어요.”

<무지개연구소> 시리즈는 러봇랩(LOVOT LAB)과의 협력으로 네온 라이트 설치작업과 함께 진행되었다. 무지개무늬로 그려진 박두리의 화면 주변으로 네온 라이트 설치작업이 자리 잡았 다. 이 전시는 작가가 입주 작가로 있었던 팔복예술공장의 전시공간에서 펼쳐진 것이다. 물질 화된 무지개 그림이 그려진 화폭과 네온 빛을 통해서 발산된 색채들은 서로 충돌하고 대립한 다. 화면 가득 무지개를 채워 그리기를 통해서 이미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 띠 추상화가 되었 으며 광학적 현상의 무지개는 네온 형광 빛으로 대체되었다. 이 모든 탐색이 어떤 내러티브를 상정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강박은 내러티브를 대체하는 이미지, 혹은 그것 의 상징, 또 다시 그 이미지를 대체하는 물질, 그 물질을 변형시키는 행위(그리거나, 만들거 나, 주무르거나, 땅을 파고 묻거나)등 복합적인 매체들의 건너뛰기를 반복한다. 이것은 그저 ‘녹는 것’에서 출발하여 ‘무지개라고 불리는 어떤 것’에 대한 변주들이다. 이 변주들을 지탱하 고 있는 한가운데 작가의 ‘그리기’가 있다.

여기서 작가의 몽상(夢想)은 끝나지 않는다. <억울한 밤의 움직임#1-9>는 9개의 장면으로 이 루어진 돌무더기 그림이다. 한 무더기의 돌무덤은 공간의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작가 특유 의 동양화 재료(장지에 분채)를 다루었던 감각은 캔버스 위에서도 여전히 저 채도의 건조하고 담백한 필치로 화면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섬세한 선묘를 통해서 돌무덤의 실체는 정교 하게 화면위에 올라 앉아 있다. 그 드라마틱한 시선 때문에 이 돌들은 성황당 당산 나무 주변 에 기도하며 쌓아 놓은 돌무덤을 연상시킨다. 돌무더기의 배열을 따라 9개의 서로 다른 화면 은 어떤 내러티브를 불러 온다. 하지만, 이 그림들 안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끌어 낼 단서가 없다. 소년의 형상이 등장했던 <녹는 것을 숨기기>, <녹는 것이 묻힌 곳>이 자신의 내러티브 를 숨기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억울한 밤의 움직임#1-9>은 그 모든 것들이 숨어 있는 장소 가 된다. 작가의 그리기로서의 혼잣말은 조약돌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는 해석 가능 한 언어가 아니다. 작가는 이 그림에 부쳐 또 다시 중얼거린다.


“모든 사건은 밤에 시작된다. 낮의 기억은 없다. 밤의 시간은 어둠 속 풍경들이 숨어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감정들에 집중하게 만들어 준다. 억울한 밤 허공을 떠다니 다 조금은 가라앉은 그 먼지들은 점점 더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문 앞에 그대로 앉아 노크 할 뿐이다. 똑!똑!똑!, 똑!똑!똑!, 쿵!쿵!쿵!, 쿵!쿵!쿵!, 쾅!쾅!쾅!, 쾅!쾅!쾅! 노크는 거세진다. 문 밖의 침묵은 여전하다. 분명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박두리의 그림은 만화나 삽화의 한 장면처럼, 보는 이들에게 어떤 사건을 전달하려는 생각으 로 그려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그림의 사건 혹은 행위가 언뜻 보아서 이 해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중요한 단서인 작품 제목을 읽고 나서도 아리송해지는 것은 마찬 가지다. 무언가 설명하기를 시작했다가 얼버무리고 또 주저하기를 반복하기 때문에 어떤 장면 은 아홉 번을 반복한 끝에도 말을 끝맺지 못해 억울하다. 입가에 맴돌다가 사라지는 말처럼, 화폭에 그려진 선명한 선들은 다시 뭉개지고 심지어 주물러 뭉개지고 다시 공간속에 스며든 다. 선명했던 기억을 쫒다보면, 잘려나간 화면위로 다시 겹쳐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각은 재빠르게 다른 장면으로 옮겨 간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기는 중얼거리는 혼잣말처럼 화면 위 를 떠돌지만, 붙잡기를 반복해도 잡히지 않는 상념들이 먼지처럼 부서진다. 형상이 되었던 것 들, 언어가 되었던 것들, 물질이 되었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다. 오늘도 상념은 하염없이 피어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