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기록되고 기억된 네러티브에서 건져 올린 상황들과 회화적 결과물들> 박창서
기록되고 기억된 네러티브에서 건져 올린 상황들과 회화적 결과물들
박창서(평론)
일상에서 발견되고 기록된 무엇인가를 그려가는 작가의 회화 작품에서 획득되는 회화성은 무엇일까? 박두리 작가의 회화 작업과 영상 작업들을 보면서 또 오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다시 박두리 작가의 작업에서 기록되고 편집된 이미지를 우리는 읽어야 할까 보아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파편적인 이미지들이 편집된 화면들에서 시간의 연속성은 사라지고 전후 과정이 제거된 동시적 상황으로 전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시간성과 움직임의 상실되어 일시 정지된 듯한 박두리 작가의 작업에서 동시적 드러나는 이미지와 상황은 중요하고 독특한 의미를 가진 듯하다.
박두리 작가는 작가가 살고 있는 일상에서 발견된 혹은 기억에 각인된 것들을 기록하듯 그리는 과정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 이렇게 수집된 이미지들은 다시 회화 작업으로 확장된다. 단순히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닌 박두리의 그림들은 작가의 주관적 감각과 감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쉽게 망각하기 쉬운 기억과 감정은 작가의 거친 붓질로 강렬하게 재현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으나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감정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은 그래서 작가의 회화에서 모호한 형태로 발현된다.
박두리 작가가 일상을 기록하듯 그림으로 그린다고 해서 일기를 적듯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일기는 대체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되지만 우리의 삶에서 매번 기억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기록할 만한 사건들이 아닌 파편적이고 순간적인 감정들은 그래서 평범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남겨진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박두리 작가의 작품에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모호하고 연약한 감정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바로 그 상황들의 머뭇거림이 맴돌 뿐이다. 바로 이러한 점들은 박두리 작가의 작품 속으로 진입해 읽으려는 우리의 의도를 밀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밀려나는 우리의 시선은 방향을 잃고 회화의 표면에서 이리저리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만약 연약한 감정들이 설명된다면 단단한 덩어리처럼 화면에 자리 잡겠지만 설명되지 못하는 감정들처럼 화면은 거칠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한다.
박두리 작가의 회화는 대상이 존재하는 재현적 회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 풍경화나 인물화처럼 대상을 관찰하여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어난 상황을 기록하여 다시 재현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다. 마들렌 뒤마를 비롯한 많은 현대 회화의 작가들이 신문이나 잡지 혹은 플라로이드 사진 등에 등장하는 대상들을 모티브로 하여 작업하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기록된 사진들 속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많은 변형의 단계를 거치며 독특한 회화성을 획득하고 있다. 박 두리 작가의 작업에서도 이와 유사한 작업의 과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경남 창작센터에서 최근에 진행하고 있는 작업들에서 작가만의 독특한 회화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기록된 이미지들과 감정의 기억들을 다른 화면으로 옮겨 작업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고민이 엿보이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네러티브의 상실과 획득을 작가의 작업에서 어떻게 유지하고 지워나갈 것인가이다. 네러티브가 획득되고 상실되는 과정에서 강화되어야 할 부분은 이야기의 구성이 아니라 그만의 회화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동양화의 기법과 서양화의 기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데 이러한 매체간의 다양한 실험들을 통해 독자적인 회화성을 획득할 것이라 기대한다. 박두리 작가는 대만의 한 레지던시에 머물며 진행된 작업들에서 이와 관련해 독특하고 강렬한 경험을 하였다. 언어가 제 기능을 상실한 이해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린 작가의 체험이 감각적으로 고스란히 작업으로 실현되었다. 영상 작업과 함께 진행된 작업들을 통해 선보인 그 때의 기억과 감각을 박두리 작가는 다시 한 번 반성적 태도로 면밀히 분석하고 재감각한다면 그만의 독자적인 회화는 건져 올려 질 것이다.